천원지폐 인물, 오천원지폐 인물 :: 누구이고 어떤 업적을 남겼을까요

많은 분들이 오만원권과 천원권 인물은 워낙 유명해서 잘 알고 있지만 오천원권 인물과 만원권 인물은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천원권 인물과 오천위안권 인물도 한국에 혁혁한 흔적을 남긴 위인이거든요. 여러분은 이 두 인물이 누구이고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천원권 인물과 오천원권 인물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누구인지 알아보고 그들이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자세히 공부해보겠습니다. 그들이 왜 지폐에 들어갈 정도의 위인인지를 중점적으로 설명합니다. 천원권 인물은 누구인가?

천원권의 인물은 조선의 유학자 퇴계 이황입니다. 이황이 살았던 당시에는 조선에 수많은 유학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퇴계 이왕은 당대 유학계의 거물로 인정받았을 정도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1502년에 태어나 1571년에 생을 마감하여 당시 조선의 붕당 중 하나였던 동인의 학문적 기반이자 정신적 지주가 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퇴계 이황의 업적

퇴계 이황은 비교적 늦은 시기의 34세로 대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오르며 순조로운 관료 생활을 보냅니다. 관료 시절에는 다른 선비와는 달리 청렴한 정치를 보였다고 합니다.그러나 곧 정치적 혼란이 찾아 그는 귀향이나 사퇴 등을 거듭, 혼란한 나날을 보냅니다.퇴계 이황이 이렇게 고향으로 사직을 반복하고 관직을 거부한 것은 당시의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적 상황이 어려운 상황에서 벼슬을 하고 한 시대를 바로잡보다는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서 인간의 올바른 삶을 밝히고 후대를 위해서 진정한 표준을 제시하고 떠날 자신의 역할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그리고 퇴계 이황은 50세 이후에는 고향에 도산 서당을 짓고 퇴계의 학덕을 우러러보며 모이는 문인들을 가르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는 인생을 보냈습니다. 이런 삶을 주는 와중에도, 조정에서는 의정부의 우·찬성, 공조 판서, 성균관 대사성 등의 관직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부하고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고 해도 곧 사퇴하고 귀향을 반복했습니다.퇴계 이황의 인생은 벼슬을 하고 관직에 대해보다는 학문을 통해서 후학을 양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퇴계 이황이 50세 이후에 저술한 “여명 도설”,”청명 도설 후서”,”주자서 절요”,”무진 여섯 조소”,”성학 열 표”등은 한국 유학 사상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저술입니다.퇴계 이황의 업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1. 관료 시절 깨끗하고 청렴한 관료로서 표상을 보였다 2.79번이나 관직을 그만두고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선비의 모습을 보였다 3. 경복궁 기록문과 위 량문, 편액의 글씨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한 4. 서원 건립에 힘쓰고, 많은 후학을 양성한 5. 학문하는 태도의 모범을 보이며 바람직한 선비 상을 확립한 6. 수많은 저술에서 성리학의 심성론을 발전시키고 수양론의 실천 방법을 규명했다.7. 퇴계 이황의 성리학은 임란 이후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친 8. 본인이 직접 후학을 양성하고 올바른 교육의 표본을 보이면서 새로운 교육 과정을 수립했다. 5천원권의 인물은 누구?

오천원권의 인물은 조선의 유학자이자 관료였던 율곡 이이입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천재 중 한 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13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장원급제를 실시하였고, 이후에도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평생 장원급제만 9차례 실시하였습니다.1537년에 태어나 1584년에 생애를 마칩니다.당시 조선의 붕당 중 하나였던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황과는 대조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율곡 이이의 업적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아들로 태어난 13세의 나이로 진사 초시를 응시하고 합격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 뒤에도 9번이나 과거 급제에 성공하고 9번 장원 공(9번 장원 한 사람)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율곡 이이가 15세 되는 해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돌아가불운을 겪고 3년 상을 마친 후 갑자기 금강산에 들어가불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유교 사회로 불교는 가장 천대 받던 시절이라, 율곡 이이의 이런 행동은 정말로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13세에 장원 급제한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죠. 이것이 율곡 이이가 당대의 다른 선비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습니다.그 뒤 21세로 한성시를 수험, 수석 장원급 꺾고 그 후 23세에 별도 시서 천도 책으로 장원급 꺾고 이어 29세에는 문과와 명경과에 장원급 꺾고 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0세까지 이조 좌랑, 홍문관 교리, 우의정 승지, 황해도 관찰사 등의 여러 벼슬을 지내고 보냈습니다. 율곡 이이가 이렇게 관료 생활을 하는 동안, 시무 세사, 동 호수 문답, 시무구사 성학 집요 등 다양한 책을 썼습니다.41세 이후에는 은퇴를 결심하고 이황과 마찬가지로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이때 굉장히 꿈 요걸, 초등은 집주, 경연 일기, 로크죠 상황 등의 책을 쓰다 퇴계 이황과 함께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48살이 되면 율곡 이이의 정체성 같은 10만냥 병설을 건의했지만, 조정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율곡 이이의 업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1. 국방력 강화에 10백량금병설을 건의했다.2. 관료 시절 깨끗하고 청렴한 관료로서 표상을 보였다. 관료 시절 당대의 부패한 제도를 개혁하려 노력한 4. 당시 동인과 서인 사이의 분쟁을 줄이기 위해서 노력한 5. 조선 후기의 실학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6. 고산 큐 곡가을 비롯한 여러 시를 남긴 7. 수많은 저술에서 당대 교육의 선을 그었다 8. 소현 서원을 짓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천원권 인물인 퇴계 이황과 오천원권 인물 율곡 이이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이 왜 지폐에 실릴 정도의 거물급 위인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비록 두 분 다 큰 업적을 남긴 위인까지는 아니지만 평생을 청렴하게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바라보며 후학 양성만을 위해 살아왔다는 점에서, 그리고 수많은 책을 저술하여 당대 학문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퇴계 이황이 천원권 인물이 되고 율곡 이이가 오천위안권 인물이 된 데는 바로 이런 점이 높은 평가를 받은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한국인들이 배워야 할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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